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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혜와 성품교육(10호)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08-05-27 16:27:20 조회 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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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성품교육

                                                                
박훈 목사
(김천신실한교회담임/
LCDNKorea영남지역대표/
한국품성훈련원품성강사)

두 종류의 지혜

지혜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원리를 관찰하여 이해하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성경은 두 종류의 지혜를 말씀하고 있다. 창조의 지혜와 구속의 지혜이다.

솔로몬은 창조세계의 지혜를 가졌던 대표적인 인물이며, 그리스도는 구속의 지혜를 가지신 대표적인 분이시다. 잠언은 창조세계의 지혜를 잘 보여준다. 특별히 잠언은 창조세계가 심고 거둠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한다. 심고 거둠의 법칙은 오늘날 모든 영역에서 준수해야 할 명확한 법칙이다. 만일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 지혜를 숨겨두지 않으셨다면 학문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좋은 학문이란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창조세계의 진리를 관찰하고 드러내어서 적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학문이다. 나쁜 학문이란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왜곡해서 관찰하고 학문화해서 가르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학문이다.

기독교 대안학교를 시작하는 분들은 좋은 학문과 나쁜 학문의 차이점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이다. 학생들에게 나쁜 학문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위배되는 일임을 알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기독교대안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다. 하나님의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의 지혜서로 알려진 잠언은 창조의 지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의 지혜를 끊임없이 하나님과 연결시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잠1:7). 참된 지혜는 심고 거둠의 법칙을 잘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경외의 관점에서 심고 거둠의 법칙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지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지혜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며 구속의 지혜에 의해서 재해석되고 적용될 때, 비로소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기독교세계관은 창조의 지혜를 가지고 세상 지혜를 대적하려 한다. 창조의 지혜를 연구해서 휴머니즘, 뉴 에이지, 다원주의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왜 진화론이 나쁜지, 왜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성경적 관점으로 세상의 이론을 대적해서 바른 세계관을 심어주려는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다. 이것은 꼭 필요한 교육이며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왜 기독교 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을 함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변하지 않는가? 왜 그런가? 변화란 첫 창조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첫 창조의 지혜로는 창조적 가치관(기독교적 가치관이 아님, 유대교도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을 가진 인간을 만들 수는 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과연 새로운 삶으로 변하겠는가?

성경은 새창조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구속의 지혜이며 곧 십자가의 지혜이다. 성경의 모든 지혜는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18,23-24)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최고의 지혜이시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고백했고,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라고 말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세상 학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십자가의 지혜로 세상의 모든 학문을 꿰뚫어야 한다. 바울은 십자가의 원리로 세상의 학문을 바라보는 능력을 가졌다. 십자가의 지혜를 가르쳤더니 사람들이 변화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십자가의 지혜(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교육의 현장에는 십자가의 원리가 있는가? 십자가의 지혜가 없는데 학생들이 변화되겠는가? 왜 구속의 지혜는 숨겨둔 채 창조의 지혜만 가르치는가? 구속의 지혜는 교회에서만 가르쳐야 하는가? 기독교 대안학교의 교육목표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아이를 교육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고자 하는가? 공교육보다 더 나은 환경을 조성해서 좋은 대학에 더 많은 학생들을 보내는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서, 세상 구석구석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인가?

십자가의 지혜에서 나온 성품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만난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이시다. 선하신 성품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피조물에 대한 사랑도 만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위대하심에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변화는 구속의 지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지혜가 구약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자와 성실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셨다. 구약에 나타난 복음이다. 그러나 모든 지혜의 절정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는 두 가지 지혜가 있다. 첫째는 대속의 지혜요, 둘째는 죽음의 지혜이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대속의 지혜(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대속의 지혜는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날 때 십자가의 대속의 진리가 믿어지고, 받아들여서 변화의 삶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에게 사랑의 성품을 주셨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성품이 무디어져 있다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만나야 한다.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접속될 때, 나의 마음 속에 사랑의 불이 일어나며, 용서와 자비와 관대함과 융통성과 환대, 그리고 대신 짐을 져줌의 성품이 생겨날 것이다.

둘째 십자가는 죽음의 지혜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대한 경청이요, 순종이요, 겸손이요, 온유요, 책임감이요, 열심이다. 주님의 죽음의 원리를 내 삶의 원리로 삼을 때, 나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경험할 수 있다.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진정한 경청과 순종, 감사와 만족, 기쁨과 겸손, 온유, 거룩 등의 성품을 경험한다.

진정한 성품은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순간, 새 성품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 안에 시작된 새 성품은 성경적 교육을 통해서 강화되고 빛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성품교육이란 나의 옛 성품에 좋은 성품을 덧씌우는 것이 아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옛 성품에 성품교육 몇 개 한다고 성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은 바뀌었다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타인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행동의 개선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려면 성품교육을 하는 교사나, 성품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십자가를 만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사랑을 만나고, 자기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성품은 십자가에서 나온다.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박아야 시작되는 것이다. 성경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한다고 말씀한다.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소욕을 따를 때 성령의 (성품의) 열매가 맺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갈5:16-24).

성품교육은 행동 몇 개를 개선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말 잘듣는 아이로 만들고, 근면 성실한 아이로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성품교육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제자가 목표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목표이다. 부모님께 순종하고, 근면하고 성실한 것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부수적으로 주시는 열매들이다(마6:33).

그리스도의 성품을 훈련하는 것은 자기 소욕을 죽이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십자가 앞에서 변화를 위해 부르짖을 때 성령님은 나의 마음을 충만케 하셔서 나의 욕정을 죽이고 그리스도가 삶의 주인이 되게 하신다. 성령님이 나를 지배하시고 성령님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관하신다. 이것이 성령충만이다.

이제 나의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는 원수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댄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간다. 원수가 핍박할 때 그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능력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났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품교육 좋은 교재를 가지고, 좋은 규율을 만들어서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변화의 비밀은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의 지혜를 깊이 깨닫고 십자가에서 대속과 죽음을 경험한 교사들만이, 그가 가르칠 때 학생들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품교육의 목표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교사의 말을 잘 듣는 아이로 만들고 싶은가? 교사의 이기심을 위해서 아이들을 희생시키지 말라. 자녀를 순종하는 자녀로 만들고 싶은가? 부모의 이기심이 거기에 없는가? 우리는 기성세대의 게으름과 이기심을 위해 차세대를 성품훈련을 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의 동기가 불순하기 때문에 이런 성품교육은 반드시 실패한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데 목표를 두지 않겠는가? 그들이 자신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과 온유, 인내와 관대함을 얻도록 기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가르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도록 먼저 교사인 나부터 주님의 성품으로 변화되도록, 아직도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는 옛성품의 찌꺼기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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