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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호 현장의 소리(학부모)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08-03-28 11:08:31 조회 2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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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학교에 자녀를 보내며....


                                               류재신(창원남중 교사, 철학박사)


집과 가까운 학교로 학생을 ‘배정’하는 현행 중학교 입학 제도는 자녀의 학교 선택권을 부모 대신 정부가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 아이들 중학교에 보낼 즈음, 우리 집 주변엔 공립 중학교들 밖에 없어서 엿새 동안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대다수의 선생님들께 자녀 교육을 맡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6:39,40)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존중치 않는 선생님들께 배우다가 결국 우리 자식들도 그 선생들과 같이 되어 무신론, 인본주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겼다. 자식이 좋은 교육을 받도록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의 심정으로 나도 두 아들 녀석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미션 스쿨이 있는 지역으로 두 번이나 위장 전입을 했다. 작가 현진건이 일제하 암흑 사회를 ‘술 권하는 사회’란 제목으로 묘사한 소설도 있지만 부모의 학교 선택권이 봉쇄된 한국교육체제야말로 ‘위장전입을 권하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어렵게 ‘위장 잠입’시키듯이 미션스쿨에 입학시켰건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사실 크게 만족하지 못해서 아쉽다. 1주일에 1회씩 채플과 성경 수업이 있다는 것 말고는 공립학교와 별다를 바 없는 교육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있었지만 우리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들은 바로는 비그리스도인 교사들과 크게 다른 분이 드물었다. 학교 내 교육 활동은 물론 야영이나 수학 여행 등 야외활동에서도 교육 내용이나 학생 보호와 지도 등에서 공립학교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사랑과 희생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은 교과로 가르쳐지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션 스쿨에서 십자가 정신은 가르쳐졌지만 그 십자가 정신이 보여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두 아들 녀석들이 각각 3년의 중학 생활을 마쳤을 때 나는 보다 철저한 기독교 교육을 하는 대안학교들을 찾아 눈을 돌렸다.


   물론 나는 내 생각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어떤 학교를 가라고 지시할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택할 때마다 우리 두 아이들과 허심탄회하게 상의를 했다. “아빠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문계 고등학교는 똑같구나. 밤늦도록 ‘자율학습’이란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타율학습’, ‘보충수업’이란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정규수업의 연장’, 그리고 ‘진실’이나 ‘가치’같은 교육 본질은 사라진 채 ‘경쟁과 성공’이라는 진화론적 적자생존 원리만이 여전히 학교 교육의 동력이란 점에서 말이다. 아빠는 너희들이 보다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보다 진실과 가치 중심의 교육을 배울 수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다. 그런 학교는 우선 기독교 학교이어야 되고, 대형 학교보다는 작은 학교가 좋겠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아이들은 감사하게도 모두 기독교 대안학교를 택했다. 다만 학비가 일반 학교보다 비싸고 매달 두 녀석 기숙사비를 보내야하니 나는 재정 부담이 퍽 컸다. 또한 그 학교는 주로 해외 생활을 경험한 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학교이니 만큼 국내파 학생들은 비주류여서 국내 학생들에 대한 입시 교육의 전문성이 다소 약한 학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을 기독교 대안학교에 보낸 것은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는 주님의 말씀을 좇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기독교 대안학교에 보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나 부모님을 존중하며 친구들을 먼저 섬기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격이 배어든 ‘신사 교육’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1년을 마치고 첫 애가 두 달간의 겨울방학을 집에서 보내기 위해 귀가했을 때, 우리 부부는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무엇보다도 귀를 한 쪽 뚫고 달고 온 번쩍거리는 귀고리가 눈에 거슬렸다. 처음 며칠간은 밤마다 상처난 귀를 치료한다고 약통을 갖다 놓고 난리를 폈다. 구약시대 노예 표시인 귀를 뚫는 짓을 왜 내 자식이 한단 말인가. 애가 변한 것은 귀고리뿐이 아니다. 집에 있으나 이동할 때 길거리에서나 내 차에 타고서도 이어폰을 낀 채 옆에서 듣기도 숨이 찬 랩 음악을 연신 불러댔다. 집에서는 방학 두 달 내내 영어 사전 한 번 펼쳐보지 않은 채 실컷 인터넷만 하다 학교로 돌아갔다. 사이월드 홈페지엔 점잖지 못한 글들과 눈살 찌푸릴만한 사진들이 어지러이 도배되어 있었고......


  우선 나는 회개를 많이 했다. 내가 믿은 것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기독교 학교였다. 내가 자녀를 맡긴 것은 ‘주의 말씀’이 아니라 헌신된 기독 교사들이었다. 그러기에 기독교 대안학교에만 입학시키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상당한 경제적 희생과 성공 신화같은 경쟁 교육을 포기하고 기독교 교육의 열정으로 기독교 대안학교에 자식을 맡겼으니 이젠 됐다는 ‘오만’과 ‘헛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아들이 주님의 제자로 멋진 신사로 성장하도록 단 하루도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 없다. 이 세상의 어떤 훌륭한 기독교 학교도 자녀 교육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자녀 교육은 주의 은혜가 임해야 되는 것을 왜 몰랐을까? 공립학교든 미션스쿨이든 혹은 기독교 대안학교든 어떤 학교라도 주의 은혜가 미치지 못할 만큼 온통 죄를 향하는 교육만 하는 곳도 없으며, 죄가 원천적으로 침투하지 않을 만큼 모두가 선한 학교도 없다.


   내 경우에서 보듯 정부는 부모가 자신의 가치와 신념대로 자녀를 교육할 수 있는 학교를 합법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부모의 학교 선택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교회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므로,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이 가정과 학교가 다른 이원론적 교육을 벗어나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육을 받도록 독려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를 위하여 무엇보다 호주의 NICE처럼 철저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사 재교육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 그리하여 준비된 교사들이 공립 학교에도, 미션스쿨에도 대안학교에도 많이 들어가서 언약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모든 영역에서 왕으로 섬기도록 가르쳐야 한다.


     국가는 부모의 학교 선택권을 인정하여 크리스천 부모들이 낸 세금이 크리스천 자녀 교육을 하는 기독교 대안학교들에 제대로 지원될 수 있도록 정책적, 재정적 지원을 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교육을 택하는 부모들이 과도한 학비 부담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교회는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여 기독교 가정의 학부모들이 바른 학교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분명한 관점을 심어주어야 한다. 학교는 부모의 가치를 최대한 존중하여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로 잘 양육할 기독 교사를 확보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교육과정을 포함한 학교 교육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교육을 하는 기독교학교를 설립하여 정착시키는 운동은 이처럼 국가, 교회, 가정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기독교 대안학교를 세우는 설립자들도, 기독교 대안학교 강단에 서는 교사들도, 자녀를 기독교 대안학교에 보내는 부모들도, 그리고 청운의 꿈을 안고 기독교 대안 학교에 들어서는 학생들도 모두 아직은 이 분야의 개척자들이다. 개척자는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서툴게 발을 딛다 보면 넘어지거나 깨어져서 상처가 나게 마련이다. 오늘날은 어느 정도 정착한 호주나 캐나다 그리고 미국의 대안 교육도 초기에는 많은 시행 착오와 댓가를 치렀다. 한국 사회에서 자녀를 기독교 대안학교에 보내는 일은 아직은 여러 시행착오를 각오하며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먼저 가는 우리가 돌다리가 되어 납작 엎드리자. 훗날 다른 사람들이 발을 물에 적시지 않고 잘 건너도록 오늘 우리가 온 몸에 물을 적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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